▲ 궁금한 이야기 Y 홈페이지 갈무리

방송작가 8년차 이은정(가명)씨는 지난 4월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궁금한 이야기 Y>에 ‘서브작가’로 합류한 뒤 약 한 달 만에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서브작가는 방송순서·시간·자막 등이 담긴 편집구성안을 작성하는데 이씨가 제출한 구성안이 미흡하다는 이유를 댔다. 이씨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방송 1회분의 작업 결과만 보고 계약해지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이씨가 계약서상 계약해지 사유를 묻자 “(계약서상) 해당 사유는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2017년) 표준계약서가 도입되고 나서 이제는 파리목숨처럼 잘리지는 않겠구나 안심했어요. 제가 취재작가(막내작가)일 때 10년 이상 일한 메인작가도 임신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잘리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계약서가 서면으로 남아도, (일을 시작한) 8년 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번에 느꼈어요.”

이씨는 SBS를 상대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김한별)에 따르면 지난 3월19일 중앙노동위원회가 MBC 방송작가 2명이 낸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받아들인 뒤 방송작가가 제기한 첫 ‘부당해고’ 사건이다. 이씨는 “SBS에서 앞으로 일을 못 하게 되더라도 작가를 이렇게 함부로 자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는 선례라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궁금한 이야기 Y> 서브작가 상근으로 일해

22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최근 서울지노위 화해 권고로 이씨와 SBS쪽이 합의하면서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이 마무리됐다. 이씨가 원래 계약기간인 12월 말까지 일했다면 받을 수 있는 임금상당액을 SBS가 지급하기로 했다. SBS가 합의에 나서게 된 데에는 방송작가를 노동자로 처음 인정한 중노위 판정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자체는 합의로 종결됐지만 해당 프로그램 방송작가의 근로자성 여부는 따져 볼 대목이 있다. 이씨를 대리한 이슬아 공인노무사(이산노동법률사무소)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인지 여부는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지 여러 징표를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며 “이 사건에서는 사용자에게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는지, 근무시간·근무장소에 대한 구속이 있었는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 등이 주된 쟁점”이라고 말했다.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SBS 소속 연출과 PD·AD, 프리랜서 작가와 프리랜서 PD·AD가 함께 일하고 있다. 작가는 아이템 기획부터 자료수집·구성·섭외·원고 작성 등 업무를 맡는다. 이씨를 포함한 서브작가 9명은 평일이나 주말 할 것 없이 오후 2시에 출근해 회의시간인 오후 7시30분까지 아이템을 찾고 자료를 조사했다. 팀장과 메인작가가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방송 코너로 선정되면 방송 제작을 위한 취재를 시작하고, 선정이 되지 않으면 다시 아이템을 찾는 식이다. 서브작가는 제작팀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채용공고에도 근무형태가 ‘상근’이라고 표기돼 있다.

아이템이 선정되면 PD·AD·서브작가·취재작가가 한팀으로 구성된다. 서브작가가 취재원·전문가를 섭외하거나 취재일정 및 장소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상시적으로 소통하며 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가 독립적으로 일하기 어렵다. 서브작가가 편집구성안을 작성하면 팀장·메인작가가 참여하는 편집구성회의를 진행하는데 내용 추가나 삭제 요구에 따라 작가는 구성안을 수정한다. 서브작가에게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주어진 재량권은 초기 아이템 선정 정도인 셈이다.

중노위는 올해 3월 MBC 아침뉴스 프로그램 <뉴스투데이> 방송작가 2명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판정했다. 방송할 아이템 선정과 원고 작성 과정에서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은 점, 방송스케줄에 맞춰 MBC 사무실로 출근한 점 등이 판단 근거가 됐다. MBC는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다음달 말 첫 공판이 예정돼 있다.

MBC 방송작가를 대리해 부당해고 구제 재심판정취소 소송에 보조참가신청서를 낸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MBC에서는 일관되게 ‘방송작가는 근로자가 아니다’고 주장하는데 원고는 아이템 선정부터 최종 원고가 나갈 때까지 ‘프리’하게 일할 수 없었다”며 “대부분 시사교양·보도 분야 작가들도 원고처럼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노동부 지상파 3사 근로감독 진행 중

방송작가의 근로자성 여부를 다투는 문제는 특정 프로그램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시사교양·보도 분야에서 일하는 작가는 대부분 프로그램 특성상 독립돼 일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허구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창작하는 드라마 작가와 달리,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시사교양·보도 작가는 자율적 영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취재·섭외·원고작성 등 업무 과정에서 유기적 협업이 요구되고 방송사 직원이 개입할 여지도 크다.

김한별 지부장은 “시사교양·보도 작가는 ‘원고료’라는 명목으로 보수를 받지만 작가들이 원고 작성만 하는 게 아니라 발제와 취재, 촬영준비 등 여러 업무를 수행한다”며 “방송사가 원고료로 ‘퉁쳐서’ 지급하지만 실질적인 성격은 근로제공에 대한 대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부는 방송사가 방송작가의 처우개선을 위해 직접 교섭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부는 지난달 18일 KBS와 MBC에 직접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교섭테이블이 마련되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KBS·MBC쪽은 최근 교섭이 아닌 ‘방송작가특별협의체’를 통해 해당 사안을 논의하자는 입장을 지부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방송작가특별협의체는 언론노조와 공영방송 3사(KBS·MBC·EBS)가 산별협약 체결을 통해 작가들의 처우와 불공정 계약 관행 개선 등을 논의하기로 한 기구다. 지난해 출범했지만 흐지부지된 상태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다. 노동부는 지난 4월27일부터 KBS·MBC·SBS를 상대로 근로감독을 실시하고 있다. 시사교양·보도 작가들의 근로자성 인정 여부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본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조사가 중단됐다가 8월 말 재개됐다. 그런데 작가들이 진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근로감독이 원활히 이뤄지고 있지는 않은 모양새다. 작가들의 채용권한이 방송사에 있는 상황에서 진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거나 소위 눈 밖에 났다가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탓이다. 김한별 지부장은 “지부 차원에서 독려를 하고 있다”며 “올해 안으로는 결론을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지난 4월26일 CJB청주방송을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방송작가 5명을 포함해 프리랜서 12명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했다.

 어고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