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들의 당당한 권리 찾기, 저희가 함께합니다.

  1. HOME
  2. 활동
  3. 언론보도

20210312 [시사인] 매일 출근하라면서 책상은 주지 않는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3-29 14:36 조회375회 댓글0건

본문



매일 출근하라면서 책상은 주지 않는다
  •  권지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 부지회장)
  •  호수 703
  •  승인 2021.03.12 21:07
  • 프린트
  • URL복사
  • 기사공유하기
  • 글씨키우기

ⓒ윤현지 그림

처음 방송사에서 구성작가로 일하던 20대, 나는 책상에 개인 물건은 볼펜 한 자루도 놔두지 않았다. 그건 어느 날 프로그램이 없어지면서 자리를 잃게 된 한 선배가 그간 쓰던 물건을 두 손 가득 챙겨 들고 나가던 힘없는 모습을 본 뒤부터였다. 프리랜서인 방송작가의 자리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프로그램의 신설과 폐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자의에 의한 혹은 정년에 의한 아름다운 퇴사란 프리랜서 방송작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늘 초라하지 않은 마지막을 생각하곤 했는데, 그것은 회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거였다. 그날의 퇴근이 퇴사가 되어도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그리고 나는 내 첫 방송사 7년의 근무를 자연스러운 퇴근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방송을 위해 조금 일찍 출근했을 때였다. 스튜디오 문이 잠겨 있었다. 지금 내가 일하는 방송사는 작가실이나 작가들의 자리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고 방송 스튜디오 안의 책상 하나를 작가들이 프로그램 시간별로 돌아가면서 쓰고 있는데, 그곳 문이 잠긴 것이다. 어느 부서의 회의를 그곳에서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거라는데, 순간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출근은 했으나 ‘있을 곳’이 없어진 나는 당황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에 있어야 하지? 순간 내가 일터라고 생각한 곳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10년 가까이 일한 곳인데도 이곳에 막상 나의 자리는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당황과 당혹, 안절부절못함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자리는 존재에 대한 인정이다. 학교에 들어가도, 회사에 들어가도 우리는 책상과 교실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러하기에 ‘장소에 대한 투쟁은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 확보를 위한 투쟁을 한다. 노동은 존재하지만 노동의 주체는 가려진 곳에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휴게 공간과 안전한 근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사람, 장소, 환대〉에서 김현경 작가는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며,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먼저 방석부터 내어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약자의 자리란, 모든 구성원의 자리를 힘의 순서대로 배치하고 난 뒤 남는 자리가 있을 때 주어지는 곳, 그러다 공간의 변경이 필요할 땐 가장 먼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곳, 그래서 필요하지만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정되는 존재의 공간일 뿐이다.

방송사 내 방송작가의 자리는 의무가 아니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조직의 일원 자격으로 부여받은 것이 아닌, 도서관 열람실처럼, 공공 공간으로서의 자리일 뿐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방송사는 작가들에게 매일 출근을 권하면서도 작가들의 책상은 따로 두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매일 방송 제작에 참여하고 원고를 쓰는 나는 이 방송사의 조직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받은 것일까, 아닐까. 또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환대를 받은 사람일까, 아닐까.

오늘 내가 앉아 있으나 내일 내 것이 아닐 수 있는 자리와 아예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 자리, 있더라도 누군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 자리, 그 가운데 사람을 위한 진짜 자리는 어디일까. 오늘도 앞 시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다른 작가가 앉았던 자리를 다음 시간 프로그램 작가인 내가 물려받아 앉으며 생각한다. 그때도 지금도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방송작가유니온

문의전화

02-6956-0050

업무시간안내

평일 09:00 ~ 18:00 (점심 12:00~13:00)
주말, 공휴일은 휴무입니다.